
1. 오아시스
카나의 중국계 일본인이라는 설정은 이민자 3세대의 정체성 균열보다는 관계적 고립을 위한 장치로 보인다. 이는 ‘문화적 혼종성’을 주제로 삼는 디아스포라 서사가 아닌, 진실한 관계의 결핍이 빚어낸 고독한 도시인의 초상이다.
오프닝의 대화에서 언급되는 자살한 동창, 보이스 오버로 전달되는 사회상, 에스테틱의 19세 신입 등의 영화 속 주변 요소들은 희망 없이 반복되는 일상과 최소한의 생존 의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감각이 반영된 집단적 우울의 표상과도 같다. 여기서 카나는 이방인이라는 태생과는 별개로 자국 내에서 고립된 자 ㅡ 가족, 미래, 믿을만한 공동체도 없이 떠도는 현대 일본 사포리 세대의 비극적 전형 안에서, 어떤 단어로도 규정짓기 힘든 독특한 캐릭터다. 그 캐릭터성은 태생적으로 특별한 개인에게서 기인한 것이라기 보다는 상술한 요소들로 인해 시대적 병증이 한 인물의 일상으로 스며들어 내면의 혼돈과 만나 특별해진 형태로 짐작된다.
따라서 <나미비아의 사막>은 두 곳에 존재한다. 카나의 내면과 카나의 도시.
카나는 그 황폐함 속에서 오아시스를 찾아 방황하는 방랑자다.
하지만 영화에서 카나가 갈구하는 그 오아시스가 무엇인지 선뜻 규정하기 어렵다.
가족도, 자립할 능력도 없는 카나는 동거할 능력이 있는 남자친구들에게 의탁하며 살아가는데, 이 동거는 애정의 영역 이전에 생존의 영역으로 해석될 수 있다. 사랑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 말고는 의지할 것이 없는 상태에 처한 카나에게 사랑은 목적이 아닌 생존 수단이자 공허를 채우려는 자구책에 불과하다. 음악이 거의 없다시피 한 이 영화에서 음악은 단 두 번 쓰였는데, 그 두 장면은 카나가 전남친을 떠나 하야시에게 달려가는 장면이다. 카나의 밝은 표정과 역동적인 움직임, 희망찬 음악은 방황 끝에 드디어 오아시스를 발견한 듯 기대감에 한껏 고조된 인상을 주지만, 그 기대는 짧은 해방감에 지나지 않았고, 오아시스는 마치 좌표가 어긋난 신기루처럼 여전히 스마트폰 스크린 안에서만 확인된다.

2. 병명
에리히 프롬은 사랑을 기술이라 보며, 그 기술의 근간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라 했다. 즉 진정한 사랑이 상대방에 대한 진실된 이해를 기반으로 한다면, 그 이해란 스스로에 대한 이해와 신뢰에서 출발해야 한다.
오아시스로 기대하던 하야시와의 동거조차 균열이 생기자 카나는 부조리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그 부조리란, 거짓과 진심이 혼재한 사회에 공포를 느끼면서도 자신조차 거짓을 능숙하게 다루는 태도, 사랑을 갈구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파괴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이중적인 충동이다. 어쩌면 잘못된 것은 관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생긴 카나는 의사에게 자신의 정확한 병명을 확인하고자 한다. “병명” 이라는 확정된 단어에 매달리며 자신의 혼돈을 명명하려는 그 절박함은 단지 치료를 위함만이 아니라 내면의 수많은 혼란들 중 하나에 이름을 붙임으로써 조금이나마 스스로를 이해하려는 시도가 아니었을까? 자기 존재를 해석할 수 있는 언어, 자기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위치. 마치 황폐한 사막에 이정표를 하나 박아두려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의사는 시시콜콜한 이유로 그녀에게 쉽게 답을 내어주지 않는다. 영화는 그 대신 발코니에서 만난 옆집 여자와의 작은 연대로 대안을 제시하지만, 그 대안은 지나치게 원론적이다.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는 믿음. 모든 것을 해결해준다는 말은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말과 같다.

3. 팅부동
그래서 <나미비아의 사막>은 카나만큼 규정짓기 어렵다. <밀레니엄 맘보>의 비키가 혼돈의 터널을 빠져나와 “뒤돌아볼 수 있는 거리”를 확보한 화자라면, 카나는 여전히 내면의 황야를 부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나미비아의 사막>은 위로 없는 시대를 담은 정직한 거울이며, 일정 부분 공감될 만큼 보편적이면서 전혀 이해할 수 없이 특별한 청춘의 자화상이다. 그녀는 아직 자신의 병명도, 사랑도, 존재의 해석도 갖지 못했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은 공감도, 비난도 아닌 응시에 가깝다. 완전한 이해를 유예한 그 시선이 명명되지 않은 고통을 확인하니 그것은 헛된 희망과 성장의 서사보다 더 진실된 위로를 담고 있다. 그로써 <나미비아의 사막>은 ‘팅부동한 영화’로 족할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미지의 갈증에 이끌려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는 삶이 아닌, 멈춰 서 한 그루의 나무를 심는 삶이 되길 바란다. 그 자리가 사막이 아닌 울창한 숲이 되길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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