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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2010~2020

[스포] 홀리 모터스 (Holy Motors)(2012) 해석 및 감상평 - 잊혀지는 모든 존재들의 아름다움

by 손거북이 2023. 3. 7.

감독 : 레오 카락스

주연 : 드니 라방

각본 : 레오 카락스

등급 : 청불

러닝타임 : 115분

장르 : 드라마, 판타지

 

2015년 7월에 작성한 글. 옮겨 둡니다.

 


 

1. 서론

 

<살인의 추억>은 두 형사가 연쇄 살인마를 추적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허나 그 이면에는 5공 시절 독재를 풍자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스릴러라는 본분에 충실하면서 교묘하게 시대 비판적 메세지를 함의한 것이죠.

 

하나의 영상에 두 가지 이야기를 성공적으로 담아내면서 최고의 영화가 된 사례라고 할 것입니다.

 

이 영화 또한 하나의 영상으로 그 이상의 메세지를 담고 있습니다.

표면적으로 한 남자가 자신의 자아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그 표현 방법이 몹시 괴상합니다.

현실에선 전혀 일어나지 않을, 비현실적 에피소드들로 다루고 있죠.

 

영화를 보시고 나면

'남자 주인공은 배우이고, <홀리 모터스>는 작품마다 각기 다른 자아를 형성하는 배우의 고뇌를 담은 영화이며,

우리에게 주는 메세지는 가면을 벗고 진정한 자신을 찾으라' 와 비슷한 감상을 얻게 되실 것 같습니다.

 

헌데, 그렇게 편하게만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불편한 장면들의 연속입니다.

왜 이 감독은 이 메세지를 굳이 이리도 난해하게 표현한 것 일까요?

 

<홀리 모터스>에게서 배우의 고뇌만을 느끼셨다면, <살인의 추억>에서 범인만 쫓고 독재를 보지 못하신 것과 같습니다.

영화가 조각상이라면, 그것을 정면에서만 볼 것이 아니라 좌우상하 다각적 측면에서 바라 볼 필요가 있겠지요.

적어도 이 영화는 그럴 가치가 충분하다는 것을 알려드립니다.

 

 

2. 오프닝 시퀀스

 

오프닝 시퀀스는 보통 영화가 말하는 핵심 주제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좋은 영화일수록 그 의미를 명확하고 강렬하게 인식시켜주죠.

 

 

<홀리 모터스>의 첫 장면은 흑백 무성 필름을 상영하고 있는 극장과 관객이 보입니다.

눈을 감고 미동도 않는 관객들의 모습이 마치 시체 같습니다.

 

그 위를 <HOLY MOTORS> 라는 제목으로 덮어버립니다.

마치 관객들에게 이 영화를 선언하는듯 하네요.

 

화면이 전환되고 한 남자가 잠에서 깨어나 손가락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옵니다.

상영관 2층에서 그들을 바라보는데, 다른 관객들에 비해 꽤나 이질적인 모습입니다.

남자가 스크린을 바라보는 장면을 자세히 보시면 갓난 아기가 복도를 기어가고 있고, 그 뒤에 꽤나 연로해보이는 개가 걷고 있습니다.

 

흑백 무성 영화, 시체같은 관객, 초현실적 남성, 갓난 아기, 늙은 개.

이 단어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하나의 쇼트에 지나지 않았던 최초의 영화로부터 오늘날까지 이 '영화'라는 영상 매체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쇼트와 쇼트의 연결로 러닝 타임이 길어졌고, 소리를 내기 시작했으며 화면에 색을 더했죠.

그 중에서도 가장 혁신적인 발전은 유형의 매체에서 무형의 매체가 된 것입니다.

'필름'이라는 유형물이 저장 매체 안의 '기록'인 무형물이 되었죠.

 

형태만 달라졌을까요?

영상의 디지털 포맷은 우리에게 CG 선사했고 CG의 비약적인 발전에 대중의 이목이 집중됩니다.

마냥 신기한 영상을 보고있자면 그 안의 내용은 크게 중요하지 않죠. 영화는 외형 뿐 아니라 내면의 모습까지도 변해갑니다.

그렇게 영화는 깊게 음미하는 컨텐츠에서 빠르게 소모되는 컨텐츠로 점차 변해갔고,

관객들은 '감상'보다 '감각적 체험'을 위해 영화를 찾게 됩니다.

 

그것은 영화와 관객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시대의 흐름 자체가 쉽고 빠른 쪽을 지향하기 때문이겠죠.

(조금 비약적으로 말씀드렸지만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이러한 기술의 발전이 배우들에겐 어떤 의미일까요?

영화 안에서 또 다른 삶을 살아가는 그들에게, 이 발전은 누구보다 더 크게 체감될 것입니다.

<호빗>에서 간달프 역을 맡았던 '이안 맥켈런'님이 촬영 현장에서 눈물을 흘렸다는 기사를 보셨나요?

이 일화가 CG 라는 허상 속에서 연기를 하게 된 배우들의 고충을 대변해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안 맥켈런이라는 현실과 간달프라는 비현실.

두 세계간의 괴리에 고통받지만, 그 경계를 넘나들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바로 배우입니다.

 

 

영화는 외형적, 내용적으로 완전한 '디지털'이 되었습니다.

영화를 '멋진 영상'으로만 바라보는 우리들의 모습이 까락스의 눈엔 '눈감은 시체'처럼 보였나 봅니다.

비현실적 공간에서 문을 열고 현실적 공간으로 들어오는 남성을 '배우'로 보시면 될 것 같군요.

오프닝 시퀀스에 담긴 의미가 조금은 이해가 갑니다.

 

 

사실, 그 남자 역을 연기한 배우는 레오 까락스 감독입니다.

그가 어떤 시선으로 관객을, 영화를 바라보고 있는지 궁금하네요.

엔딩 크레딧에서 그의 배역은 Le dormeu (잠자는 사람)이라고 올라와있는데,

비현실적 세계(괴이한 방)에서 현실 세계(극장)로 들어온 후에도 그의 손가락 열쇠(비현실의 상징)는 변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는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상태고, 앞으로 보여줄 영화도 꿈같은 이야기라고 말하는지도 모릅니다.

갓난 아기와 늙은 개는 그저 그의 몽환적 표현일 수도 있겠죠.

 

 

이 영화는 내형, 외형적 아름다움을 잃어버린 필름에 대한 향수이자,

그 아름다움을 기억해주길 바라는 레오 까락스의 마음에서 시작합니다.

 

마치 디지털 음원이 지배해버린 음반 시장에서

비틀즈의 노래를 담은 레코드판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이해해주길 바라는 중년 가수처럼요.

 

 

 

 

3. HOLY MOTOR

 

Motor ; 1. 전동기, 모터 2. 자동차

Holy Motor 를 직역하자면 신성한 모터 혹은 자동차가 되겠군요.

아시겠지만 신성한 자동차는 드니 라방(남자 주연)이 타고 다니는 리무진입니다.

그렇다면 신성한 모터는 뭘까요?

 

그가 리무진에서 내릴 때마다 비현실적인 에피소드가 다뤄지지만, 리무진 안에서는 우리의 현실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비현실과 현실, 영화와 일상으로 대입할 수 있겠군요.

분장, 대본을 준비하는 리무진의 안은 영화 속 현실이고,

리무진 밖의 세계는 영화 속 영화가 됩니다. 저는 이것을 초현실이라 하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극 안에서 다른 세계를 창조하는 시도는 <인셉션>의 몽중몽과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인셉션이

현실 -> A

영화 (현실 - 꿈 - 2차 꿈 - 3차 꿈 - 코마) -> B

와 같은 A와 B 라는 세계로 이루어진 2차원적 형태라면

 

홀리모터스는

현실 -> A

영화 -> B

영화 속 영화 (각 에피소드) -> C

와 같은 3차원적 형태가 되겠습니다.

 

인셉션에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꿈을 꾸더라도, 그의 자아가 변하는건 아니죠.

하지만 홀리 모터스에서는 영화 속 영화라는 세계에 들어가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되기 때문에 저런 식으로 구분한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관객인 우리의 현실(A)과 리무진 안의 비현실(B), 리무진 밖의 초현실(C), 세 가지 세계가 있는 거죠.

A와 B의 경계가 매체로서의 영화라면 B와 C의 경계는 리무진입니다. 영화와 리무진의 역할이 같죠.

따라서 Holy Motor 는 영화의 상징인 신성한 영사기(모터)를 뜻하며, 리무진은 극 중 '영화'를 뜻하는 메타포가 됩니다.

 

 

하지만 Holy Motor 에는 숨겨진 뜻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건 천천히 밝혀 볼게요.

 

 

 

4. 나는 단수가 아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몇가지의 '나'로 살고 있을까요?

 

이기적인 나, 욕심 많은 나, 변덕스러운 나, 의욕적인 나, 게으른 나, 낭만적인 나, 열정적인 나

 

부모로서의 나, 누군가의 자식인 나, 사회적 위치로서의 나, 친구로서의 나, 연인으로서의 나

 

이렇게 우리의 자아는 자신의 일시적 감정과 원초적 본능에 기반한 내적 자아

타인, 사회와의 관계를 통하여 맺어지는 외적 자아로 구성되어있습니다.

 

저 수많은 자아들의 집합으로 '내'가 존재하죠.

 

애당초 이것들을 구분하는 것이 어리석은 시도로 보일 수 있지만,

또다른 자아를 표출하는 행위를 위함으로 접근하면 잘못된 시도만은 아닙니다.

브루스 웨인이 배트맨의 '가면'을 쓰는 것은, 자신의 신분을 감추기 위함만이 아니라

내면의 또다른 자아인 '다크나이트'를 발현하기 위함인거죠.

 

우리는 내적 자아와 외적 자아의 괴리를 감당할 수 없을 때, 가면을 씁니다.

때때로 그 가면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으면 그 자아를 죽이기도 하죠.

a라는 친구와 절교를 한다는 것은, 'a의 친구인 나'의 외적 자아를 죽이는 것 과도 같습니다.

 

반대의 경우는 어떨까요?

그와 관계가 나의 감정보다 더 중요해졌을 때, 우리의 내적 자아는 가면을 쓴 외적 자아에게 죽음을 당합니다.

예컨데 'a의 친구인 나'를 위해서 '이기적인 나'를 죽이는 것이죠.

(비약이 좀 심하지만 글의 흐름을 위해 짧게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관계라는 '다른 영화' 속에서 '다른 자아'를 연기하는, 마치 배우같습니다.

혹시 배우도 그저 연기하는 것이 아닌, 하나하나의 영화에 자신의 내적 자아를 표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제 우린 '배우' 오스카보다는 '인간' 오스카에 대한 성찰이 필요합니다.

 

 

 

4.1. 오스카의 11가지 얼굴

 

 

그는 노파, 쫄쫄이, 광인, 아버지, 악단, 살인자, 은행 강도, 노인, 연인 에피소드를 마치고 침팬지 가족들의 곁으로 돌아갑니다.

운전 기사 '셀린'의 말대로 9개의 스케쥴을 소화하죠.

 

헌데 은행 강도 씬에서는 셀린이 '혼동이 있었다' 합니다. '은행 강도'는 애당초 계획에 없던 배역이었죠.

 

그렇다면 계획 되어있던 9번째 스케쥴은 바로 침팬지 가족의 가장을 의미합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는 귀가(비현실 속 현실로의 회귀)했던 것이 아니라 '가장'이라는 다른 역을 소화하려 내린거죠.

(사실은 아니지만, 당장 표면적으로는 그렇습니다)

 

 

 

VOTRE ; 당신의, 너희들의 MAISON ; 집, 가정 // 각본까지 준비 되어있던 '나의 집'

 

 

VOTRE 라는 단어가 복수로 쓰일 수 있다는 것이 의미심장합니다.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일까요?

 

리무진에서 내리면서 셀린이 내일 같은 시간에 뵙겠다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일 아침엔 침팬지 가족의 배웅을 받으며 리무진을 타겠군요.

영화의 초반부에서 부유층으로 보이는 그가 가족들의 배웅을 받으면서 출근했던 것 처럼요.

같은 논리라면, 그 성공한 사업가의 모습도 결국 하나의 역할에 지나지 않았던 거죠.

 

가족이 침팬지로 설정 되어있는 것은 리무진 밖이 여전히 초현실적 세계임을 암시하는 장치입니다.

판이한 두 가정 속에서 오스카의 역할인 '가장'은 변함이 없죠.

'가장'이 같으니 '가족'도 다를 바 없습니다.

즉, 사람 = 침팬지라는 논리로 현실과 비현실의 괴리를 무너뜨리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 또한 '오스카'의 연기 중 하나였음을..

 

 

사업가, 침팬지 가장, 8+1가지 스케쥴.

<홀리 모터스>는 9가지 장르의 다른 영화를 연기하는 배우의 모습을 그린 것이 아니라,

영화가 현실, 현실이 곧 영화가 되어버린 인간의 11가지 모습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다시 '은행 강도' 에피소드로 돌아가면, 그가 죽이는 남자는 다름 아닌 '그' 자신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렸다 싶이, 외적 자아와 내적 자아의 괴리가 불러온 '자아 살인' 이죠.

'오스카' 가 내적 자아라면 '은행원' 은 외적 자아(다른 작품의 캐릭터)겠군요.

 

바로 전 에피소드는 '살인자' 에피소드이고, 여기로 넘어오는 도중 그는 리무진에서 '살인이 부족하다' 고 말합니다.

그리고 계획에 없던 행동을 하죠. 즉, 그는 이 장면에서 최초로 리무진 밖에서 '연기' 가 아닌 진실된 '욕망' 을 표출합니다.

그의 다른 캐릭터를 죽인다는 것은, 그가 많은 자아들을 더이상 감당하기 힘든 정신 상태에 이른 것이 아닐까요.

 

하지만, 이 세계는 총에 맞아도 죽지 않는 허구의 세계입니다. 있는 힘껏 표출한 욕망 마저도 연기로 치부된 것이죠.

 

 

그렇다면 본질이라는 게 무엇일까요?

 

살해한 자아는 맨 몸이고 살해당한 자아는 양복을 입고 있습니다.

'본질' 이라는 것이 허위로 치장된 것이 아닌, 나의 가장 순수한 면이라고 가정한다면

양복이라는 '허례허식' 보다는 맨 몸이 더 본질 쪽에 가깝겠네요.

헌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본질이라는 놈이 가면을 쓰고 있습니다.

 

이는 결국 외적 자아와 내적 자아는 서로 상위를 따질 수 있는 가치가 아닌, 상호 동등 관계에 있는 가치임을 의미합니다.

결국 어느 것도 본질이라 할 수 없는 것이고, 둘 다 본질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치 '다크나이트'가 '아메리칸 사이코'를 죽이는 것 같군요. 하지만 둘 다 '크리스챤 베일'이죠)

 

 

어쨌거나 이 에피소드는 오스카가 처음으로 자신의 진심을 보였다는 것에 의의를 둘 수 있습니다.

그 행동은 '연기'가 아닌 그의 순수한 '욕구'였죠.

이에 대한 것은 다른 부분에서 다시 한 번 이야기하겠습니다.

 

비현실(B)의 욕구가 초현실(C)에서 표출되면서, B와 C의 경계가 모호해졌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현실(A) 을 더하여 그 경계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4.2. 현실(A)과 비현실(B), 초현실(C)의 경계

 

 

그럼 그가 언제부터 B와 C의 경계를 혼동하게 된 걸까요?

그는 어디에 속한 사람일까요? 아니면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일까요?

그의 정체성은 무엇일까요.

 

 

 

'살인자' 에피소드에서 '오스카'는 '테오'를 죽이고, '테오'는 '오스카'를 죽입니다.

오스카가 배우라면 테오는 캐릭터죠.

캐릭터를 죽이는 것은 곧, 캐릭터를 연기하는 나를 죽이는 것과 같음을 암시합니다.

 

둘 중 하나가 살아 돌아오는데, 외모가 똑같은 그를 보고 있자면 우리는 그가 오스카인지 테오인지 알지 못합니다.

만약 살아 돌아온 쪽이 테오라면, 캐릭터가 배우를 잠식한거죠.

'본질'이 모호해진 이 상황은 '은행 강도' 씬과 매우 닮아 있습니다.

(현실 속에서 살펴보자면 메소드 연기에 대한 은유랄까요)

 

 

여기서 우린 B와 C의 경계가 과연 견고한 것인지 의문을 갖게 됩니다.

오스카가 죽고 테오가 살았다면, C안에서만 존재해야 하는 인물이 B로 침범하게 된 것이니까요.

 

 

 

 

'노인' 에피소드에서 오스카는 침대에 누워 테오에 대해 중얼거립니다.

지금까지 C 세계에 넘어오면 전혀 다른 인격이 되던 그가 처음으로 다른 작품의 캐릭터를 거론하는 것이죠.

이 또한 B와 C는 완벽히 이분할 수 없는 세계임을 암시합니다.

 

그럼 살아돌아온 쪽이 오스카였을까요?

오스카와 테오를 이분할 수 있던 증거는 'B와 C는 명확히 다른 세계라는 것'입니다.

 

B와 C의 경계가 무너진 지금, 그는 오스카이자 테오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우리가 살고 있는 A는 어떨까요?

 

 

 

 

'광인' 에피소드의 이 캐릭터는 영화 <도쿄!>(B)의 광인과 닮았습니다.

둘 다 레오 까락스가 창조한 것임을 감안하면 같은 캐릭터라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우리가 A에서 B로 보던 캐릭터가 B안에서 C의 캐릭터가 됐네요.

즉, '광인'이라는 캐릭터로 인해 A와 B의 접점이 생깁니다.

 

 

 

 

'아버지' 에피소드에서 딸의 파티 배경음과 핸드폰 벨소리로

'카일리 미노그'의 노래 'Can't get you out of my head'가 나옵니다.

카일리 미노그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A)의 가수이며 노래 역시 2000년대 초반에 현실에서 히트한 곡이죠.

A와 C가 노래 한 곡으로 접점을 만납니다.

 

'광인'이 A와 B를 동일화했다면 '노래'가 A와 C를 동일화 한 셈이군요.

 

아이러니하게도, 카일리 미노그는 이 영화에서 '연인' 에피소드 중 '진/에바그레이스' 역할을 맡은 배우이기도 합니다.

이 영화 안에 한 여성이 '카일리 미노그'(A), '진'(B), '에바 그레이스'(C) 3가지 세계에서 3가지 자아로 존재하는 셈입니다.

 

근데 그녀는 한 명이죠. 이쯤되면 A와 B와 C는 애당초에 나눌 수 있는 개념이긴 한 것인지 궁금해집니다.

 

 

 

 

그녀는 '연인' 에피소드에서 진이라는 배우로 에바 그레이스라는 역을 연기하다가 자살합니다.

그 장면 넘어로 리무진이 보이는데, 리무진은 세계를 구분하는 경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문이 열려 있으니 경계가 모호해진 셈이죠.

 

죽은 그녀는 카일리일까요? 진일까요? 에바일까요?

그녀의 정체성은 가수일까요? 배우일까요? 캐릭터일까요?

세 사람이 죽었지만 시체는 하나입니다. 곧, A=B=C가 되는 순간이죠.

 

우린 A에 살고 있으니, 이 영화는 막연히 '배우'의 고뇌를 담은 영화가 아닌, 우리의 이야기라고 말하는 거죠.

 

 

 

 

셀린이 업무를 마치고 리무진에서 내리는 장면입니다.

앞에서 리무진 밖의 모든 세계는 C 이며 A,B,C의 경계가 무의미 해졌음을 밝혔습니다.

A의 구성원인 우리는 그녀가 될 수 있고, 그녀도 우리 중 한 명인 셈이죠.

 

그녀는 배우가 아님에도 가면을 씁니다.

다른 자아를 가지고 연기하는 것은 배우들 만이 아님을, 우리들도 포함하는 것임을 직접적으로 암시하는 장면입니다.

(ID 많잖아요?)

 

여기까지가 자아 충돌적 관점에 집중한 <홀리 모터스>의 단면입니다.

최초의 교훈인 '가면을 벗고 진정한 자신을 찾으라' 를 얻을 수 있겠군요.

 

그럼 이제부터 <홀리 모터스>의 이면을 살펴보겠습니다.

 

 

 

 

 

5. 아날로그와 디지털

 

 

서론에서 말씀드렸듯이, 인간 정체성의 본질을 이야기하는 영화라면 각 에피소드가 그렇게 난해했을 이유가 없습니다.

몰입이 되지 않는 에피소드들은 핵심 메세지 전달을 방해할 뿐이죠.

따라서 우린 에피소드 하나하나가 갖는 의미까지도 생각을 해봐야 합니다.

 

또한 이 영화는 내형, 외형적 아름다움을 잃어버린 필름에 대한 향수이자,

그 아름다움을 기억해주길 바라는 레오 까락스의 마음에서 시작한다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마음이 극 중에서 어떤 형식으로 표현되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또한

이제부터 '영사기'로 대변되는 모든 형태와 감성을 통칭 '아날로그'로,

그와 판이한 현대의 것을 통칭 '디지털'이라 부르겠습니다.

 

 

 

 

5.1. <1막>에 대하여

 

9개의 에피소드 중 가장 유별난 것은 '악단'입니다.

 

 
ENTRACTE : 1. (연극・쇼 등의) 막간 // 2. (연극・쇼 등의) 막간극 막간 ; 막과 막의 사이

 

'악단' 에피소드 시작 전에 ENTRACTE 라 적힌 악보를 받게 됩니다.

이 에피소드를 전후로 1막과 2막을 명확히 나눈 것이죠.

 

그렇다면 1막과 2막을 나눈 기준이 뭘까요?

저는 극 중 오스카가 상징하는 의미라고 해석했습니다.

 

제 해석의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1막에서의 오스카는 아날로그 또는 디지털 자체를 상징하고

2막에서는 그와는 조금 다른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이제부터 <1막>을 살펴보겠습니다.

 

 

 

 

'노파' 에피소드에서 그는 행인(대중)들의 관심과 돈을 구걸합니다.

하지만 철저히 외면 받죠. 그는 너무 늙었고 죽는 것보다 살아있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는 '아날로그' 일지도 모릅니다.

 

 

 

 

'쫄쫄이' 에피소드에서 그는 러닝 머신 위를 뛰면서 총을 난사합니다.

러닝 머신 위는 아무리 뛰어 봤자 제자리고, 그의 총알엔 대상이 없죠.

그의 모든 행위가 결국 허상이 됩니다.

그는 '디지털' 일지도 모릅니다.

 

+ '디지털'이 러닝 머신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뒤로' 넘어지는 장면은

기술이 발전함 (러닝 머신의 속도 증가)에도 영화는 '퇴보'하는 해학적 풍자가 아닐까 싶습니다.

 

 

 

 

빨간 쫄쫄이와 사랑을 나눕니다.

'디지털'과 대조를 이루는 그녀는 '아날로그' 일지도 모릅니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사랑을 나누는데, 그는 그녀의 겉만 핥을 뿐, 속살에 닿지 못합니다.

아날로그의 본질적 아름다움에 닿지 못하는 디지털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겠군요.

 

 

 

 

'광인' 에피소드에서 그는 무덤을 활보하며 생화를 씹어먹고 뱉는 것을 반복하는데,

이는 영화에 빠르게 접근하고, 소모하고, 버리는 현대 소비자들의 태도를 암시하는지도 모릅니다.

묘비명에 VISIT MY WEBSITE 도 인상적이네요.

 

그는 '디지털'일까요?

아니면 그저 <도쿄!>의 '광인' 메르드일 뿐 일까요.

 

 

 

 

천박한 그가 디지털이라면 그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여인은 아날로그가 될 수도 있겠군요.

촬영사가 피사체를 여인에게서 광인으로 바꾸는데, 이는 대중의 기호 변화 혹은 영화 산업 시장의 변화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아날로그에서 천박한 디지털로 변하는 거죠.

샷을 연사 하는 촬영사의 모습이 감독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공장물품처럼 쏟아져 나오는 상업 영화들을 풍자한 장면이 아닐까 합니다.

 

 

+ 촬영사는 상반신은 스웨터까지 겹쳐입고 하반신은 반바지를 입었는데,

이 모순된 복장에서 저는 '이중 잣대'라는 단어가 떠오르더군요.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뭐 이런류의.

 

 

 

 

하수구로 돌아온 광인이 여인의 드레스를 변형하여 입힙니다.

자신은 전라(全裸)로 극단적인 노출을 하고, 여성은 이슬람 전통 의상인 '히잡'으로 극단적 폐쇄를 시키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또 다른 대조는 원초적 욕망인 발기와 무릎 베개가 있습니다.

<도쿄!> 에서 광인이 꽃을 베고 누웠던 것으로 미루어 보면, 무릎 베게는 순수를 상징할 수도 있겠군요.

 

광인 - 여인 / 노출 - 폐쇄 / 욕망 - 순수

 

3가지 양극의 개념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디지털과 아날로그도 공존을 꿈꾸려는 것일까요?

 

 

 

컨트리 팝을 듣는 아버지와 최신 히트 곡을 듣는 딸.

세대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그도 아날로그, 그의 딸 역시 아날로그입니다.

외형(파티, 유행곡)은 디지털이지만 내면(감성)은 아날로그임을 암시하는 대사들이 있죠.

딸의 친구인 '소니아'는 디지털로 해석되네요.

 

그의 딸은 거짓으로 위안을 얻으려 하고(내면의 디지털화) 그는 그의 딸에게 벌을 줍니다.

'너의 벌은 네가 되는 것이다, 너 자신으로 살아가는 것'

이 시대에서 아날로그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녀에겐 너무나 가혹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늙은 아날로그는 자신의 유산을 남기고 퇴장합니다.

 

 

종합하자면 이 에피소드는

'아버지'라는 이전 세대가 '딸'이라는 현 세대들에게 해주고 픈 조언이자

늙은 '아날로그'가 힘겨운 시대를 살아가야 할 젊은 '아날로그'에게 보내는 격려이자 위로입니다.

 

 

지금까지 제 해석이 맞다면, 까락스는 왜 이렇게까지 디지털을 비판하고 아날로그를 찬양했던 것 일까요?

 

 

 

 

5.2. 드니 라방의 고백

 

2막에선 '살인자', '은행 강도', '노인', '배우' 4가지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는데,

핵심은 에피소드가 아닌, 리무진 안(B)에서 남성과의 대화 장면입니다.

 

 

 

 

영화 관계자로 보이는 노인(a)과 오스카(b)의 대화.

 

 

a : 자네 일이 아직도 즐거운가? 최근 우리 중 일부는 자네가 최근에 지쳐 보인다 해서 묻는 걸세. 일부는 보면서도 믿지를 않네

b : 카메라가 그리워요. 전에는 사람보다 무거웠는데. 머리보다 작아 지다니, 이젠 볼 수도 없어요. 가끔씩은 저도 믿질 못해요.

a : 향수는 좀 감상적 아닌가? 악당들은 감시 카메라를 볼 필요가 없지.

b : 우리 모두를 불안하게 하시려고요?

a : 이미 그렇잖아? 난 그래. 항상 확신 했었지.. 언젠가 죽을 거라고. 질문 하나 하겠네. 무엇 때문에 계속 하는 건가?

b : 시작하게 만든 그것... 연기의 아름다움이죠.

a : 아름다움? 그건 눈에 달렸지. 보는 사람의 눈.

b : 더 이상 보는 사람이 없다면?

 

 

우린 앞에서 A=B=C를 학습했기에, 이는 단순히 오스카라는 캐릭터가 연기하는 대사가 아닌,

드니 라방의 관객을 향한 직접적인 고백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레오 까락스가 이토록 경계를 허물고 각 에피소드들을 통해 아날로그를 찬양했던 건,

어쩌면 이 고백의 진정성을 가장 잘 전달하고 싶어서 였는지도 모릅니다.

 

 

영화 촬영 기법의 변화로 <(배우 - 카메라 - 감독) - 관객> 이라는 상호 관계가 허물어졌습니다.

'연기의 아름다움'을 담는 '카메라'와 그것을 보는 '관객의 눈'이 사라졌음을 뜻하죠.

이것은 배우의 개인적 고뇌가 아닌, 시스템 전체의 변화에 대한 회의를 느끼는 것입니다.

 

 

즉, <홀리 모터스>가 단순히 '연기'하는 배우들의 고뇌를 담은 영화가 아닌,

디지털 영화에 죽어버린 아날로그 영화에 대한 향수와

대중들이 그 아름다움을 돌아봐주길 바라는 까락스의 소망이 직접적으로 담겨있습니다.

 

 

 

 

 

6. 영화라는 삶, 영화조차도 하나의 삶.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옛 것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그는, 그저 시대착오적 발상에 빠진 걸까요?

영화도, 배우도, 관객도 그 누구 하나 '잘못'한 것은 없습니다.

시간이 흘렀고, 기술이 발전했으며 세대가 변했을 뿐이죠.

 

이 사실조차도 레오 까락스는 잘 알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투영한 듯한 노인의 대사에서 이와 같은 자세가 드러납니다. '향수는 감상적', '언젠가 죽을거라고 확신했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아날로그' 가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35mm 필름'에 '어벤져스'가 담겨있어도 그것이 아름다울까요?

필름엔 '찰리 채플린'이 담겨있기 때문에 아름다울 것입니다.

(저 마블 안티아닙니다. 저도 마블 좋아함)

 

어쩌면 먼훗날 제 3의 저장매체가 생기고, 우리는 DVD에 담긴 어벤져스를 향수할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아날로그'와 '디지털'은 서로 전혀 이질적인 것이 아닌, 시간의 흐름 위를 같이 걷는 동반자인 것입니다.

 

 

또한 이 모습은 우리의 삶과 닮았습니다.

아날로그가 아름다웠고, 잊혀졌고, 죽은 것처럼

디지털 역시 아름답고, 잊혀질 것이고, 죽게 되겠지요.

그리고 그 '무언가'가 디지털의 뒤를 이을 것입니다.

 

아버지들이 죽어갔고, 현재를 우리가 살고 있으며, 자손이 우리의 뒤를 이을 것처럼요.

(그가 오프닝 시퀀스에서 보여준 '갓난 아기' '늙은 개'의 의미가 이제 이해가 갑니다)

 

 

영화라는 '인류' 속에, 아날로그라는 '인간'

아날로그가 영사기라는 모터를 가진 Holy Motor 라면

인간 또한 심장이라는 모터를 가진 Holy Motor 라고 할 수 있겠네요.

 

 

잊혀져가는 모든 '영화와 인간'

<홀리 모터스>의 세 번째 이야기는, 이것에 관한 것입니다.

 

 

 

 

6.1. 오스카의 선택

 

'은행 강도' 에피소드에서 오스카의 연기가 더이상 허상이 아님을 앞에서 언급했습니다.

이제 그 이후의 이야기를 다루겠습니다.

 

 

 

 

'노인' 에피소드에서, 그는 잊혀지는 것에 대하여 소녀와 대화를 합니다.

이 대화는 진실일까요? 연기일까요?

 

자신을 삼촌이라 부르던 그녀의 이름을 묻는 장면에서 이 모든 게 허구였음을 뜻하죠.

따라서 이 대화는 '대사'일 뿐, 오스카의 진심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아직 B와 C의 경계를 완전히 허물지 못한 셈이죠.

 

그는 아직 '잊혀진다는 게' 무엇인지 진정으로 느끼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는 '연인' 에피소드에서 또다른 배우인 '진'을 만납니다.

그와 그녀 발 밑에 널브러진 마네킹들.. 잊혀진 것들에 대한 은유가 아닐까요?

이 씬에서 마네킹은 계속 강조됩니다.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살아남죠, 우린 누구였죠?'

가사의 의미가 이제는 좀 더 많은 것을 느끼게 합니다.

사라지는 모든 존재에 대한 위로를 담은 노래가 아닐까요.

 

또한 이 노래는 레오 까락스의 사별한 연인 '예카테리나 골루베바'를 위한 노래이기도 합니다.

엔딩 크레딧에서 그녀의 사진이 잠깐 나오죠.

예카테리나와 마찬가지로, 그녀 또한 죽게 됩니다.

 

그녀는 그가 아닌 다른 남자와 함께 죽습니다.

그는 죽을 이유가 없습니다. 이건 아직 '연기'니까요.

그의 각본에 죽음은 없었나봅니다.

 

 

 

 

이 장면에서 그는 오열하며 뛰어갑니다.

오스카는 지금까지 '살인자' 에피소드와 '은행 강도' 에피소드에서 두 번 죽었습니다. 그리고 멀쩡히 살아났죠.

이 곳이 허구의 세계라면 그녀는 다시 살아 날텐데 왜 그는 진심으로 오열한 것일까요?

 

위에서 말씀드렸듯, 세계간의 경계가 허물어졌기 때문이죠. 더이상 허구가 아닙니다.

 

'진'은 <홀리 모터스>에서 처음 만난 자신의 '동류'입니다. 다른 리무진을 타고 있던 유일한 배우죠.

그녀의 죽음에게서, 그는 그의 죽음을 본 것일까요?

 

 

 

 

'침팬지' 에피소드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여보 애들아 좋은 소식이 있어, 우리 삶이 바뀔 거야'

 

그의 자아가 정착할 곳을 찾은 걸까요?

아니면 이것마저 VOTRE MAISON (당신의 집) 이라는 각본의 대사 중 일부일까요?

 

 

 

 

'침팬지' 에피소드 전에, 이 흑백 영화가 삽입됩니다.

흑백 영화는 <홀리 모터스>에서 총 3번 볼 수 있는데, 오프닝 시퀀스, 1막의 끝, '연인' 에피소드 후 입니다.

이 흑백 필름은 단순 아날로그에 대한 오마주가 아닌, 막을 구분하고 있는 장치가 되는 건 아닐까요?

 

1막은 오프닝부터 '악단'까지

2막은 '악단'부터 '연인'까지.

 

즉, 막에 포함되지 않은 '침팬지' 에피소드는 극이 아닌 '삶'이라는 거죠.

 

이는 단순한 '오스카'의 변심이 아닌, '진'의 죽음을 통해 자신도 '잊혀질 존재'라는 것을 자각한 오스카의 선택입니다.

그것이 가족들이 침팬지로 구성된 허구의 세계일지라도, 그 삶에 충실하기로 마음먹은 것이죠.

 

 

즉, 그의 삶은 영화가 되었고, 영화는 그의 삶이 되었습니다.

그의 자아 역시도 정착할 곳을 찾았군요.

 

 

 

 

6.2. HOLY MOTORS

 

 

 

 

'셀린'이 HOLY MOTORS 라는 곳에 도착합니다.

HOLY MOTOR는 리무진이자, 영화이며 인간임을 앞에서 언급했습니다.

 

이 곳은 주차장이자 상영관이며 우리 사회가 되겠네요.

 

 

 

 

리무진에서 '오스카'와 '셀린'의 대사 중 '마지막엔 웃겨야 한다' 라는 말이 있죠.

지금까지 잊혀지는 것에 대하여 슬픔을 호소했다면, 이 장면은 해학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셀린이 떠난 주차장에서 리무진들이 대화를 나눕니다. 마치 사람처럼요.

'5700번 노인', '낡은 엔진', '자려는 사람도 있어', '우린 고물이 돼 간다구' 등등

리무진들을 의인화하여 HOLY MOTOR에는 인간이라는 뜻도 담겨있음을 알려주고 있죠.

 

리무진 = 영화 = 인간 성립하면서,

영화라는 삶, 영화조차도 하나의 삶 이라는 세번째 주제에 이른 것 같네요.

 

 

엔딩 크레딧 장면 중 레오 까락스의 사별한 연인 '예카테리나 골루베바'

 

 

우린 지금까지 이들의 이야기가 타인의 것이 아닌 우리의 것임을 보아왔고,

영화와 인간은 '잊혀지는 존재'로서 같은 본질을 갖는다는 것을 알아봤습니다.

 

 

결국 그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은, 잊혀져 가는 사람(아날로그)들의 아름다움을 기억해 주길 바란다는 것입니다.

 

 

 

 

 

7. 마무리

 

이동진 평론가는 이 영화를

영화라는 인생, 인생이라는 가면, 가면이라는 운동, 운동이라는 영화.

라 평가했습니다.

 

삶 --->> <인생(영화) { 우리들(배우) - 가면(연기) }> --->> 죽음

시간의 흐름

 

제 머리 속엔 이 평이 이렇게 그려지네요.

핵심을 관통하는 정말 멋진 평가가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이 영화의 메세지를

4장에선 '자아 정체성 탐구'

5장에선 '아날로그의 아름다움'

6장에선 '잊혀지는 존재로서의 영화와 인간' 세가지로 나누어 해석했습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제 편의상의 해석입니다.

 

<셀마>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전기를 다룬 설명문,

<킬빌>이 타란티노가 그린 만화책이라면

<홀리 모터스>는 레오 까락스의 시라고 할까요.

 

시를 국어책에서 배우듯 하나하나 분석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죠.

<홀리 모터스>는 시를 감상하듯, 전체를 느끼는 것이 올바른 방법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글 또한 저의 개인적인 감상이자 해석일 뿐, 절대 '정답'같은 것이 아님을 알려드립니다.

이상님의 시를 국어책에서 해석 해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듯이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해석을 했던 것은

저 또한 그가 바라보던 '눈 감은 시체'같은 관객 중 하나가 아니었나 하는 반성에서 시작했습니다.

 

여러분들께도 이 난해한 영화를 감상하시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시 길 바라며 이 글을 마칩니다.

 

 

한줄평 : 영화라는 인류 속 아날로그 인간. 잊혀지는 모든 존재들의 아름다움.

 

내 별점 : 10 / 10

IMDb : 7.0 / 10

Holy Motors (2012) - I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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