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들어 부쩍 한국 극장 업계의 위기에 관한 이야기가 빈번히 들려옵니다.
그에 관련된 흥미로운 기사가 있어 공유하고 제 생각을 적어봤습니다.
[취재후] 가격 내려라? 볼 게 없다?…댓글 7천여 개 달린 ‘한국영화 위기론’ 속사정 (naver.com)
요약하자면
관객과 영화계 관계자의 입장은 티켓 값이 너무 비싸다, 조정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반면 극장 업계는 가격 인하보다는 특별관 등에 투자를 늘려 유인책을 모색하겠다는 입장입니다.
기존의 대중 친화적 전략보다는 클래식이나 뮤지컬 공연처럼 고급화 전략을 취하겠다는 뜻인데, 적어도 당장은 가격 인하를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는 것이겠죠. 오히려 티켓 가격이 더 상승할 수 있다는 여지를 둔 발언으로 해석됩니다.
일례로 엔드 코로나 시대가 열리고 국내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영화 <아바타 : 물의 길> 의 경우 관객의 53%가 일반 상영관보다 더 비싼 특수 상영관을 선택했다는 점을 들고 있습니다. 또한 가수 임영웅의 공연 실황을 담은 <아임 히어로 더 파이널> 의 경우에도 일반관보다 더 비싼 스크린X 관을 선택한 관객의 비율이 더 높다는 점을 예시로 언급합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극장 업계의 방향성에 대해서는 몇가지 의문점이 생깁니다.
모든 영화가 특수 상영관에서 상영할 가치가 있는가?
예시로 든 <아바타 : 물의 길> 의 경우 초기 제작 과정에서 이미 3D 상영을 염두에 둔 작품입니다. IMAX 인증을 받은 Sony CineAlta 베니스 3D 카메라를 사용하여 촬영한 작품으로, 4K HDR 3D 소스를 지원하기 때문에 CGV의 IMAX 상영관 혹은 메가박스의 Dolby Cinema 상영관으로 감상해야 100% 즐길 수 있는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일반적인 24fps 영상이 아닌 48fps HFR(High Frame Rate) 기술이 사용되었기에 적어도 특별 상영관에서 감상하는 것과 2D 일반 상영관에서 감상하는 것에는 대단히 큰 격차가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영화가 이런 방식으로 촬영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역대급 제작 규모를 바탕으로 시각 기술 효과가 극대화 된 아바타이기에 가능했던 부분이라 할 수 있고, 멀티플렉스에서 상영되는 대부분의 영화들은 여전히 전통적인 방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이는 팬데믹 이후 최대 흥행 성적을 거둔 한국 영화 <범죄도시 2> 의 제작비(130억)와 <아바타 : 물의 길> 의 제작비(2조 6500억원)를 비교해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두 영화의 일반 상영관 관객수와 특별 상영관 관객수 비율에 대한 공식적인 데이터는 없지만 각 영화의 누적 관객수와 누적 매출액을 비교해보면 1인당 티켓 가격을 어림짐작할 수 있습니다.
- 범죄도시 : 누적 관객수 1269만 / 매출 1313억 -> 1인당 티켓 가격 : 10,347원
- 아바타 : 누적 관객수 1079만 / 매출 1363억 -> 1인당 티켓 가격 : 12,630원
아바타가 범죄도시보다 관객수는 적지만 총 매출액이 높은 이유는 특별 상영관 관객 비율이 범죄도시보다 높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아바타의 개봉 시기에 맞춰 멀티플렉스 측에서 3D 상영관의 비중을 높이기도 했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 듯 단지 아바타가 특별한 경우일 뿐, 1년을 통틀어도 특별 상영관 비중을 늘려서 상영할 정도의 대작 영화는 그리 많지가 않습니다. 또한 장르와 같이 영화의 성질에 따라 일반 상영관에서 관람해도 크게 상관없는 경우가 대다수 입니다. 누적 관객 1269만명을 동원한 범죄도시만 해도 이 영화를 일반 상영관에서 관람했기 때문에 불만족스러웠다 는 의견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으니까요. 스펙터클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 영화라면 당연히 특별 상영관 수요가 상대적으로 더 높겠지만 그렇지 않은 영화들이 더 많으니까요.
특히 할리우드에 비해 제작 규모가 확연히 작은 한국 영화로만 따지면 특별 상영관 비중을 늘릴 정도의 작품 범위가 더욱 좁아집니다.
더욱이 범죄도시가 개봉했던 2022년 상반기에 비해 지금은 더욱 가격이 상승하여 현재 티켓 값은 주중 14000원, 주말 15000원 정도의 가격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컨텐츠가 보장되지 않은 상황에서 특별 상영관 확장을 통한 고급화 전략이 과연 효과적일까요? 저는 5G 통신망 보급의 이유로 최신 기기에 5G 요금제를 강요하고 기본 이용료를 대폭 상승시킨 3사 통신사의 횡포가 떠오릅니다. 하지만 생활에 필수적인 통신비와 문화 여가 생활로 즐기는 영화 비용은 직접 비교가 불가능하죠. 결국 고급화 전략은 비용을 감수하고 극장을 찾는 사람들과 아예 외면해버리는 사람들의 양극화를 초래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팬데믹 이후 티켓 값은 얼마나 상승했나?
먼저 미국의 경우 팬데믹 전이었던 2019년 9.19달러에서 12달러로 30% 가량 상승했습니다.
한국의 현재 티켓 가격은 대략 15000원으로 2019년 평균 10000원에서 50% 가까이 올랐습니다. 현재 환율을 계산해서 위 표에 대입하면 11.53$ 로 프랑스에 이어 21번째로 영화 티켓 가격이 비싼 나라가 됩니다.
팬데믹 기간동안 양적 완화와 제로 금리를 유지해 온 여파와 22년 2월 시작된 러-우 전쟁으로 인해 시작된 글로벌 인플레이션이 일상 생활의 전반적인 영역에 영향을 끼쳤고, 극장가도 이를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특히나 영화 업계는 코로나 시기에 가장 막대한 피해를 받은 분야로, 그 기간동안 입은 피해를 만회하려면 티켓 값 상승은 불가피한 실정입니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듯 영화 관람은 여가 생활의 일종일 뿐이며 필수 고정 지출에 포함되기 어렵습니다. 가계 경제가 악화된다면 가장 먼저 줄어들 포지션이죠. 가격적인 메리트가 없다면 다른 활동으로 여가 시간을 보내는 것이 당연한 현상입니다.
또한 관객의 입장에서는 오랜 격리 기간을 거치며 OTT 라는 새롭고 간편한 대체재를 찾았고, 서비스 퀄리티는 나날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특히나 유행을 중시하는 우리나라 문화를 고려했을 때 사회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컨텐츠가 굉장히 중요한데, 이 자리를 넷플릭스를 위시한 OTT 컨텐츠들이 극장 영화들을 완벽히 대체하고 있습니다. 가뜩이나 급변한 환경 탓에 극장을 찾는 수요가 줄어들었는데 가파른 티켓 값 상승은 상황을 더 악화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볼만한 영화가 없다.
아래는 2022년 한국 영화 흥행 성적표입니다.
오랜 팬데믹이 끝나고 <범죄도시 2>가 천만 관객을 돌파하며 손익분기점의 7배나 되는 수익을 올렸을 때, 다시 극장의 시대가 찾아오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작년 상반기 기대작이었던 <외계+인>, <비상선언>의 흥행 참패로 인해 상황은 다시 악화됩니다. 두 영화와 같이 상반기 빅4 라 불렸던 <한산>, <헌트> 는 손익분기점은 넘겼으나 역시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으로 마감했죠.
특히 <외계+인>, <비상선언> 이 두 영화의 실패가 생각보다 더 큰 파장을 불러왔다고 생각합니다. <외계+인>은 한국 영화 최고의 흥행 보증 수표였던 최동훈 감독의 영화로 한국에선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의 투자를 받았는데 개봉 1,2주 만에 '망작' 이라는 입소문을 타고 처참히 실패합니다. 여러 스타 배우들을 총동원한 <비상선언> 또한 쏟아지는 악평에 개봉 후 2주도 지나지 않아 흥행 기세가 꺾입니다.
결국 비싸진 티켓 가격에도 불구하고 극장을 찾은 관객들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영화는 더이상 흥행에 성공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관람 의사가 있는 잠재 관객들은 그 불만족스러운 감상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여 관람을 포기하게 되는 것이죠.
반례로 <올빼미>의 경우 막강한 티켓 파워를 가진 스타 배우도 없고 마케팅도 다른 작품들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지만 손익분기점의 50% 이상 수익을 내면서 흥행에 성공합니다. 그 배경에는 역시 '재밌는 작품' 이라는 입소문이 있었죠.
바로 지금 극장가를 점령하고 있는 두 일본 애니메이션 <스즈메의 문단속>과 <더 퍼스트 슬램덩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경우 최근 누적 관객수 424만명을 돌파하며 국내 개봉한 일본 애니메이션 부문의 흥행 기록을 경신했습니다. 물론 원작이 워낙 충성도 높고 넓은 연령의 팬층을 보유하고 있는 작품이라 가능했던 측면도 있지만 최악의 불황기를 맞고 있는 극장가에 최고 흥행 기록을 세운 것은 주목할 만한 성과입니다.
즉, 관객이 원하는 영화가 상영되고 있다면 지금 가격에도 여전히 극장을 찾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죠.
극장은 결국 영화로 승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업계는 최근 연이은 흥행 실패로 인해 제작비의 70~80% 정도의 지분을 담당해오던 펀드나 창업투자사들의 투자 심리가 크게 위축됐고, 대기업 자본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찾아왔다고 합니다.
흥행 실패 -> 투자 규모 축소 -> 제작비용 감소 -> 한국 영화 존폐 위기로 이어지는 연결 고리가 시작되었다고 말하죠. 하지만 우리 나라는 팬데믹 전까지 인구당 세계에서 가장 영화를 많이 보는 나라였고, 경제 규모에 비해 독자적으로 제작하는 영화 또한 많았습니다. 이처럼 양산된 영화들은 몇 해 전 제작된 할리우드 영화를 그대로 답습하거나 몰개성하고 완성도 낮은 작품들이 대부분이었죠. 또한 그때 그때 사회적 분위기를 감지하여 특정 부류의 소비 심리를 저격하는, 다분히 정치적인 영화들도 많았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2000년대 초기 영화들에 비해 현재 영화들의 작품성은 크게 나아진 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만들면 돈이 되니까' 식의 상업 논리가 양적으로 팽창했던 경제 시기와 맞물려 흥행을 주도했을 뿐, 그 크기에 비해 깊이 있는 방향으로 산업이 발전해왔다고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이제는 올라간 티켓 가격만큼이나 깐깐하고 높아진 관객의 니즈에 맞는 '옥석' 만이 생존할 수 있는 환경이 되었죠. 전례 없던 위기를 맞이한 한국 영화계가 자성의 시간을 갖고 더 발전된 모습으로 변화하길 기대해 봅니다.
결론은 이렇습니다.
- 물가 상승을 고려한 티켓 값 상승은 불가피하나 성급한 고급화 전략은 더 큰 악영향을 끼칠 것이다.
- 현재 티켓 가격이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이나 현재 가격을 지불할 의사가 있는 관객도 여전히 많다.
- 따라서 관객을 유인할 만한 양질의 영화를 제공하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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