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데미언 셔젤
각본 : 데미언 셔젤
주연 : 마고 로비, 디에고 칼바, 브래드 피트
등급 : 청불
러닝타임 : 189분
장르 : 드라마, 블랙 코미디, 시대극
데미언 셔젤 감독의 4번째 장편 영화.
<위플래시>(2014)와 <라라랜드>(2016).
단 두편만으로 할리우드의 신성으로 떠오른 감독, 데미언 셔젤의 4번째 장편 영화 <바빌론>입니다.
<바빌론>은 그가 아주 오래 전부터 하고 싶었던 이야기로, 구체적인 작품을 구상하는 것에만 12년 정도가 걸렸다고 인터뷰를 통해 밝혔습니다. 그는 예전부터 할리우드의 역사와 초기 할리우드에 대해 많은 관심이 있었는데, 이 소재를 작품으로 만들겠다고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계기는 그가 상상하던 초기 할리우드의 모습과 실제로 알게 된 사실에 큰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가 밝힌 바로 그 시기는 완전한 혼돈의 시대였으며 특히 마약에 찌든 LA, 야만적인 영화 제작 환경, 제약 없는 행동들을 용인하던 시대성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특히 제대로 된 체계가 완성되지 않은 이러한 환경 때문에 새로운 기술이 도입될 때마다 산업이 크게 요동쳤는데, <바빌론>에서 다루는 이 기술이 바로 영화에 소리를 넣는, 무성영화가 유성영화로 변화한 것을 말합니다. 1920년대 초반부터 시도된 이 기술은 <바빌론>의 주요 시대적 배경이 되는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초반까지 막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바빌론>은 급속히 변화하는 격동의 시기를 마주한 세 사람의 이야기를 중심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데미언 셔젤과 떼어놓을 수 없는 키워드는 '음악' 입니다.
<위플래시>, <라라랜드>, <퍼스트맨>과 마찬가지로 이번 영화에서도 그의 친구이자 동문인 저스틴 허위츠가 음악 감독을 맡았습니다. 특히 이번 영화에서는 1920년대를 다루고 있지만 그 당시 특유의 나른하고 부드러운 재즈 섹션 재현에 충실하는 것이 아닌 로큰롤을 차용하여 더 강렬하고 육중한 사운드로 재구성했다고 합니다. 이는 결과적으로 대단히 성공적인 시도였다고 생각합니다.
아래는 감상평입니다.
엔딩 씬의 혼란스러운 몽타주를 보고 든 감정은 당혹감이었다. 보통 영화를 보고 나서는 좋다, 별로다, 구리다, 쩐다, 아쉽다 같은 감정들이 마땅히 주를 이룰 텐데 그 주요 감정들을 제치고 당혹감이 가장 큰 경험은 참 오랜만이었다. 이건 적당한 예시도 떠오르지 않을 만큼 새롭다.
데미언 셔젤은 마치 내일이라도 영화 산업이 망해 없어질 것처럼, 지금 당장 보내지 않으면 안될 것처럼 영화에게 폭발적인 애증이 담긴 러브레터를 적었다. 그 애증이라는 양가감정이 각자가 낼 수 있는 최대 출력을 낸 느낌이다. 마치 극도로 맥시멀하게 표현된 이 영화의 시각, 청각적 효과처럼.
'영화에 대한 사랑을 담은 영화' (정확하게는 <바빌론>은 할리우드지만) 라면 당장 떠오를 만한 것이 주세페 토르나토레의 <시네마 천국>(1988), 마틴 스콜세지의 <휴고>(2011), 코언 형제의 <헤일, 시저!>(2016), 조금은 방향이 다르지만 타란티노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2019) 같은 영화들을 꼽을 수 있겠는데, 이 영화들은 무르익을 데로 익은 각 영화의 감독들이 성숙한 자세로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는 회고록, 포용력 충만한 어른의 사랑 같은 감정을 담고 있어서 특별히 복잡할 것도, 혼란스러울 것도 없지만 - 헤일, 시저! 의 우스꽝스러운 풍자 마저도 대단히 성숙한 편이다, 바빌론에 비하면 - <바빌론>은 마치 갓 첫사랑 고백에 실패한 사춘기 소년처럼 폭발적인 감정을 분출하고 있다. 사랑과 증오를 동시에. 생긴 건 전혀 안 닮았지만 이 난장판에 해학과 자학을 다섯 스푼 정도 더하면 우디 앨런의 영화가 될 것만 같다.
보는 사람 입장에선 달래 줘야 할지, 놔둬야 할지, 같이 울어야 할 지 도무지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 당혹스러운 이 기분이 바로 <바빌론>을 본 직후의 감정이었다.
그러니까 데미언 셔젤이라는 이름이 우리들의 귀에 들어오게 된 것은 2014년 <위플래시> 로, 그 이름이 10년도 되지 않은 신성이다. 물론 영화 만드는데 경력이 뭐 그리 중요하겠느냐만, 시간이란 것은 어떠한 편법도, 속임수도 통하지 않는 영역이라 오랜 시간 숙성된 세월은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깊은 감동을 준다.
예컨대 타란티노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가 감동적인 이유는 물론 '샤론 테이트' 의 비극적인 역사를 대체하고 악인을 처단한 것이 주된 요인이 되겠지만, 그 기저에는 이 영화가 다른 누구도 아닌 천방지축 폭력 유희왕(...) 타란티노의 성숙하고 진중한 자세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니까. '좋은 감독이 되고 싶다' 는 극 중 대사에 담긴 그의 고백마저 그가 찬란했던 시간이 저물고 어느덧 은퇴할 시기에 접어들었기에 더 절절히 와닿은 것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한 마디로 <바빌론>의 엔딩 몽타주를 바라보며 감상에 젖어들 만한, 데미언 셔젤과 함께한 추억이 내겐 너무 적다는 거다. 앞서 말했다시피 그는 아직 신성이니까. 만약 스콜세지가 그의 4번째 영화로 <휴고>를 찍었다면 똑같이 벙쪘을 거다. '아니 왜 지금 이런 영화를...' 하면서 말이지. (참고로 스콜세지의 6번째 영화가 <택시 드라이버>다)
이런 식의 발상이 지나치게 꼰대 같을 수도 있겠지만,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여러 갈래로 뻗어 나간 이 영화의 거대한 줄기가 하나의 점으로 수렴하는 곳이 결국 엔딩 몽타주에 있기 때문이다.
혐오 조장에 가까울 정도로 시종 똥과 오물을 투척한 것도, 비윤리적이고 야만적인 영화 제작도, 내다버린 워크에씩도, 술과 약에 찌든 파티도, 블랙 페이스를 위시한 인종 차별도, 저마다의 군상극까지.
결국 이 모든 것들이 영화라는 거대한 파노라마 속에 새겨질 가장 찬란했던 한 순간을 포착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고, 그 추악한 이면을 아무리 헤집어도 결국 우리는 영화를 사랑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 며 외치는 영화니까.
물론 엔딩씬 하나만 놓고 이처럼 편리하게 축약하기엔 너무 많은 매력을 가지고 있는 영화다.
여러 사실들을 기반으로 한 - 대표적으로 실제 배우를 오마주 한 잭 콘래드와 넬라 라 로이, <재즈 싱어>와 <싱 인 더 레인> 등 - 구체적이고 섬세한 묘사는 영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흥미롭게 감상할 수 있는 포인트였고, 이를 3시간이 넘는 러닝 타임 내내 지루하지 않게 소화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지루함을 달래는 큰 요인으로는, 물론 매력적인 배우들의 호연도 있겠지만 그에 못지 않게 중요했던 시퀀스 구성을 꼽을 수 있겠다. 각 시퀀스는 마치 하나의 뮤지컬 넘버처럼 기승전결을 갖추고 있어 매순간마다 몰입도를 높이고 많은 장면들을 관객의 머리 속에 인상 깊게 새겨 놓는다. 예를 들어 오프닝 시퀀스의 넬라와 레이디 페이 주의 화려한 공연, 혼란스러운 촬영을 마무리 짓는 석양의 키스, 목이 잘린 방울뱀, 거물 제작자에게 내뿜는 넬라의 구토, 평론가와 잭의 대화, 스너프와 프릭쇼를 연상케 하는 LA의 똥꾸멍, 매니의 프로포즈와 엔딩씬까지.
할리우드 초기 역사를 최대한 자세하게 담아내려 했던 만큼 자칫하면 장황하고 지루하게 흘러갈 수도 있었던 이야기가 치밀하게 설계된 구성으로 다채롭게 이어진다. 물론 인물 중심의 시퀀스가 아닌 사건 중심의 시퀀스로 진행되다 보니 극 중 인물의 감정에 몰입하여 보는 것이 익숙한 대다수의 관객들에게는 스토리가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는 느낌을 주게 되고 이것은 <바빌론>의 호불호가 갈리는 지점이 되지만, 10여년에 이르는 역사를 다루는 영화이기에 선택과 집중의 결단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나온 최선의 결과라고 짐작된다. 반대로 넬라와 매니의 꿈과 사랑, 혹은 잭 콘래드의 흥망성쇠에 방점이 찍힌 영화였다면 제목부터 수정해야 했겠지, <바빌론>이 아니라 <라라랜드 2> 또는 <I Flash>로.
같은 맥락에서 호불호가 갈리는 다른 포인트인 페이 주와 시드니 팔머 (흑인 재즈 연주가) 에 할애한 분량도 조금은 수긍이 간다.
넬라와 매니, 잭 콘래드와 같은 캐릭터는 아무래도 전형적이라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다. '할리우드 드림' 을 꿈꾸는 재능 넘치는 여자, 꿈과 사랑이라는 양자택일의 상황에 놓인 남자는 이미 감독의 전작 <라라랜드> 를 통해 접했던 이야기이고, 만약 성 역할까지 바꾼다면 클래식에 가까운 설정이 된다. 잭 콘래드처럼 세월의 흐름에 도태되는 스타 이야기도 마찬가지.
그렇기에 페이 주와 시드니 팔머의 서사를 추가함으로써 <바빌론>에 그 당시만이 가지고 있던 독특한 특색 - 자막 제작자, 블랙 페이스 - 을 부여하고 변화에 대처하는 각기 다른 태도를 묘사하며 이야기가 더욱 풍성해진다. 무엇보다도 뻔히 예상 가능하게 흘러가는 극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특히 페이 주의 경우 나는 감상할 때 극 중 인종 밸런스라든지 오리엔탈리즘 같은 편협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는데, 나중에 검색해보니 '안나 메이 웡' 이라는 실제 인물을 모티브로 한 것을 알게 됐다. 망할 놈의 PC가 뇌를 절여놨다.
결론짓자면 나는 이 영화가 싫지 않다.
감상 직후 느낀 당혹감을 어느 정도 해소하고 생각을 정리해보니 A급 예산으로 이런 소재를 다룰 수 있는 영화가 절대로 많지 않을 것이고, 언젠가 한 번은 접했어야 할 역사와 고발 이야기를 쉽게 접할 수 있던 좋은 기회였다는 생각마저 든다. 어찌 보면 100년 가까이 지난 과거이기에 <우먼 인 할리우드>(2018) 나 <와인스타인>(2019) 같이 본격적인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제작하기엔 무리일 것이고, 역시 <바빌론> 같은 방법으로 그 역사를 소개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OTT 강세에 서서히 쇠락중인 스크린 산업계에 이런 자조적이고 역겨운 이미지로 가득한 영화가 시기상 적절한가 생각하면 너무 이해타산적 발상 같기도 하고. 여하튼 데미언 셔젤의 뚝심이 놀라운 영화다.
잭 콘래드(브래드 피트)와 아내와의 대화에서 '연극은 10만 관객이면 대박이지만 영화는 쪽박이다' 라는 대사가 떠오른다.
나는 언젠가 영화도 연극이나 뮤지컬처럼 점점 마이너한 분야로 그 산업 크기가 줄어들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었다.
OTT 영화를 즐겨보는 사람들은 스킵과 일시정지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고 일상에서는 유튜브 영화 리뷰나 쇼츠, 틱톡 처럼 점점 더 많은 영상들이 간소화되고 있다. 그와 반비례로 시청자들의 영상 집중력은 나날이 낮아지는데 극장은 되려 코로나 여파로 인해 티켓 값을 올려버렸으니, 요즘은 내가 가정한 이 흐름이 더욱 가속화된 듯한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50년 정도가 흐른 뒤에 스크린 산업이 저물고 '극장에서 100만 관객이면 대박이지만 OTT 에서는 쪽박이다' 라는 대사를 접하게 된다면 어떨까. 아마 그때는 엔딩 몽타주에 <바빌론>이 한 자리 차지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평론가가 잭 콘래드에게 했던 대사처럼 재생되는 순간 세월을 뛰어넘어 우리 곁에 찾아오는 불멸의 존재들을 추억하며 감상에 젖게 되지 않을까.
매니가 쫓던 '더 크고 더 가치 있는 무언가의 일부' 는 어쩌면 관객도 포함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줄평 : 20세기 할리우드의 파노라마
내 별점 : 7 / 10
IMDb : 7.2 /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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