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조던 필
각본 : 조던 필
주연 : 다니엘 칼루야, 키키 팰머, 스티븐 연
등급 : 12세
러닝타임 : 130분
장르 : 공포, 미스터리, SF, 스릴러
조던 필의 3번째 장편 영화
TV 쇼 Key & Peele (키앤필) 시리즈로 유명한 조던 필 감독의 3번째 연출작 놉(Nope)입니다.
조던 필은 2017년에 자신의 성공적인 감독 데뷔를 이끌었던 <겟 아웃>과 차기작 <어스>(2019) 를 통해 작품 속에 자신만의 개성을 녹여냈는데요. 독창적인 발상과 연출은 상당한 강점이라고 생각했지만 정작 하나의 장르 영화로서 만족스러운가? 하면 저에겐 아쉬움이 더 큰 작품들이었습니다.
특히 <어스>는 <겟 아웃>에서 얻은 명성과 지지를 토대로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 - 백인과 흑인, 지배와 피지배층의 전복, 계층 화합 - 를 더욱 명확하게 드러낸 영화라고 볼 수 있는데, 그 전개 과정에서 드러난 핍진성 및 개연성 부족은 저에게 큰 단점으로 다가왔습니다. 영화 전체가 마치 창작자의 메세지를 전달하기 위해서만 만든 꼭두각시 인형극 같았다고 해야 할까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억지스러운 캐릭터들의 행동과 몇몇 설정들은 <어스>를 하나의 장르 영화로 즐기기엔 턱없이 부족한 느낌이었습니다. 조던 필의 이력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작중에 담긴 의도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는 셈이었죠. 단순 '난해하다' 는 느낌과도 거리가 멉니다. 오히려 직관적이고 단순한 영화인데, 극 중 인물들의 비이성적인 행동과 비현실적인 설정에 몰입이 되질 않으니 어렵게 느껴질 뿐이었죠.
<놉> 에서는 조던 필의 작가주의적 성향이 더욱 짙어 집니다. <겟 아웃>과 <어스>가 흑인의 관점에서 바라본 미국의 세태 - 인종에 따른 계층 구조와 차별적 시선 - 에 대한 비판을 담은 영화라면 <놉>은 그것에 미디어 자본주의 시대의 카메라 권력 그로부터 파생되는 피사체에 대한 폭력, 그리고 조던 필 개인의 영화에 대한 애정을 더한 영화였습니다. <겟 아웃>과 <어스> 보다 담고자 하는 이야기가 더 많아진 셈이죠. 다만 그 여러가지 메시지 중 극을 관통하는 하나의 중심 주제가 모호합니다. "그래서, <놉>은 대체 무슨 영화야?" 라 묻는다면 '이런 영화다' 라고 선뜻 대답하기가 어렵습니다. 언급한 많은 주제들이 명료히 정리되지 않은 느낌입니다.
결과적으로 담고자 하는 이야기에 대한 욕심에 비례하여 영화 자체가 더 난해 해졌고, 장르성은 더욱 축소되었습니다. <놉>을 장르주의적으로 비평한다면 공포와 미스터리, SF 각각의 부문에서 높은 점수를 줄 수 있을까요? 취향에 따라 갈리겠지만 전 전혀 아닙니다.
특히 <놉>의 SF 적 요소가 너무 억지스럽고 게으르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는데, 저에겐 이것이 <놉>의 가장 큰 단점으로 느껴집니다.
2010년 이후로 SF 장르는 <인터스텔라>, <그래비티>, <어라이벌>(한국명 : 컨택트) 같은 영화들을 중심으로 현실 속 과학 기술 수준을 반영하며 점점 더 정교하고 지적인 방향으로 발전해 왔는데, <놉>의 과학 수준은 이런 방향을 크게 역행합니다. 아무 맥락 없이 등장한 괴 생물체는 '카메라', 혹은 '촬영' 으로 비유된 창작자의 독단적인 메타포, 혹은 알레고리에 지나지 않죠. 관객이 그것을 자연스럽게 수용할 기반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놉>의 관객들은 시험지의 해설본을 들춰보듯 분석 영상을 찾아보고 나서야 그 숨겨진 의미를 깨닫게 되죠. 서구권에서 조차 Youtube Breakdown (유튜브 해설 영상)이 필요하다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개인적으로 이런 식의 영화가 좋은 영화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좋은 영화는 난해한 내용일지라도 그것을 감출 줄 아는 영화, 중의적 표현이나 숨겨진 의미를 파악하지 못해도 그 자체로 재밌게 즐길 수 있는 영화라고 생각하거든요. <놉>은 적어도 그런 영화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조던 필은 <겟 아웃>, <어스>, <놉> 에서 보였듯 한결같이 '흑인 인권 문제' 를 대주제로 설정하여 그들을 차별하고 멸시해왔던 백인 지배층에 대한 비판적인 영화를 찍고 있는데, '흑인 인권 운동을 위해 영화를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노골적입니다. '영화' 보다 '흑인' 이 중요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요.
물론 그들에겐 잊을 수 없는 피의 역사이겠지만 저 같이 단순히 재밌는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는 관객들에겐 이런 지속적인 호소는 반감이 느껴집니다. 특히 코로나 발발 이후 흑인이 아시아인에게 가한 무분별한 테러 사건도 적잖이 있었으니까요. 모든 인종 평등을 주장하는 것이 아닌 흑인의 대변인 입장에 서 있는 조던 필을 제가 지지할 이유는 없지요. 뭐 재미라도 있다면 모를까..
2022년 8월 극장에서 관람 후 왓챠피디아에 아래의 감상평을 남겼었는데 부적절한 표현으로 신고 처리되어서 여기에 옮깁니다. 좀 거친 표현이 있긴 해도 블라인드 될 정도는 아닌 거 같은데 쩝..
조동필 선생님께.
할 말이 많으신 것은 참으로 잘 알겠습니다.
태초부터 '영화' 라는 생물의 일부였으나 사회 계급적 핍박으로 인해 조명 받지 못한 흑인들의 정당한 권리를 탈환하려는 그 거룩한 대의, 대단히 존중하며 더할 나위 없이 시의적절하다 생각됩니다. 쾌락과 유희만 쫓는 미디어와 그로 인해 일방적으로 소비되는 피사체들에 대한 통찰력도 뛰어나십니다. 시드니 루멧의 <네트워크>가 나온 지 50년이 다 돼가지만 뭐 어떻습니까. 이쯤에서 다시 한 번 경각심을 줄 수도 있죠. 흑인-동양인-침팬지-말-진자켓으로 이어지는 플롯도 인상적입니다. 특히 동양인까지 배려해 주신 넓은 아량에 같은 동양인으로서 감사하네요. 근데 그 동양인 놈은 기껏 살려줬더니 주제도 모르고 그 부도덕한 생태계에 편승하여 같은 방법으로 영리를 취하는군요. 죽어 마땅합니다.
아날로그의 미학을 추구하는 척 cg로 커머셜 비디오나 찍는 주제에 필름 카메라 들고 깝치는 백인은 어떻습니까. 프레임 속 생명체들의 창조주라도 된 것 마냥 촬영이라는 권력에 도취되어 겁대가릴 상실했으니 죽어 마땅하지요.
물론 <홀리모터스>를 연상케 하는 구성으로 아날로그에 대한 헌사를 가볍게 표하신 점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군요.
장르 영화의 거장 답게 공포, 미스테리, SF 등 다양한 장르적 재미를 선사하시는 것도 인상적입니다.
우선 공포. 가장 큰 공포라면 역시 이 영화의 티켓 값이 15,000원이나 한다는 점입니다. 일개 중소기업 OTT 주제에 히치콕, 베르히만, 타르코프스키 등의 고전 명작을 포함한 양질의 영화가 수천 편 제공되는 왓챠라는 플랫폼의 프리미엄 이용권 한 달 가격이 딱 그 정도 한다는 점에서 더욱 공포스럽게 다가옵니다. 최근 매각 기사가 계속 뜨던데 서비스 종료할까 봐 걱정되네요. 아직 못 본 영화 많은데.
두번째로 미스테리. 스펙터클을 경계하라는 취지의 영화가 전 세계 아이맥스에서 상영되는 아이러니를 보고 있자면... 정체를 알 수 없는 미스테리한 감정이 듭니다. 생업에 종사하느라 지친 현대인들이 찰나의 위안을 얻고자 찾은 영화관에서도 인생의 귀감이 될 만한 따끔한 일침을 날리시니, 그 엄중한 자세가 놀랍습니다. <시네마 천국>과 <이창>에서 그랬듯, 프레임 안에 매몰되지 말고 현실을 직시하라는 취지일까요? 목 마른 자에게 표주박에 담긴 물을 주시는 척 그 박으로 대가리를 후려치시는 강단이 매섭네요. 그 교훈을 위해 스스로의 영화를 개노잼으로 만드시는 희생 정신이 감탄스럽습니다.
근데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시며 열심히 관람을 독려하시는 모습은 또 미스테리하군요...
허나 저의 미천한 영화력으로는 쉬이 납득하지 못할 부분이 있습니다. 스필버그의 <우주전쟁>이 2005년 작이고 <Arrival>이 개봉한지도 벌써 7년이 흐른 것을 감안하면 이 미지의 생명체 설정은... 어떤 부분에서 SF적 감흥을 느껴야 할 지 잘 모르겠군요. 잘못 빚은 송편처럼 생긴 것이 후반엔 그란데 사이즈 만두피를 팔랑거리는게.. 혹시 얼마 남지 않은 한가위를 향한 일종의 축사일까요? 이번에 직접 내한도 하셨으니 더욱 신빙성 있는 추측이라 사료됩니다. 시신경도 없어 보이는 놈이 관찰 당하는 것에 극도로 흥분된 반응을 보이는 게 어떤 생물학적 설정일까요? 비가시적인 초음파나 열감지 센서에 의한 것일까요? 특히 반전기장은 ㅋㅋㅋㅋㅋ 아 죄송합니다. 물론 디지털 기기를 몰아내면서 옛 것에 대한 향수를 표현하기 위한 설정이셨겠지요. 사진이 디지털 포맷으로 발전하면서 UFO나 심령사진 등 미스테리한 현상들이 자취를 감춘 현실과 같은 맥락을 공유하니 썩 보기 좋군요. 그래서 저 괴생명체를 촬영하려면 필름 카메라가 필요하지요. 4k 는 너무 노골적이예요.
제임스 웹 우주 망원경이 1000 광년 이상 떨어진 행성의 대기를 관측하는 이 시대에 과학적 설정은 '환상특급' 수준에 머물러 있는 모습. 강단 있고 좋습니다.
봉준호 감독은 '한강 괴물' 이라는 아이디어의 완성도를 위해서 '주한 미군 독극물 무단 방류' 라는 실제 사건을 가져와 인과성을 마련하는 세심함을 보인 적이 있습죠. 그런 방식은 남자답지 못해요. 사내라면 선생님처럼 지 꼴리는 대로 갑툭튀한 괴생명체에 밑도 끝도 없는 상징을 부여해야 합니다. "응~ 이거 카메라고 알레고리야~ 이해 못하는 니가 영알못~" 이게 상남자고 시네필이죠.
조나단 놀란은 SF 각본 하나 쓰겠다고 4년 동안 공부해서 대학 학위까지 따던데, 그 찌질함에 비할 바 못되는 호방함입니다.
영화가 끝나자마자 제 앞에서 관람하던 고딩 4인방이 감히 이르길 'X발 차라리 원숭이가 사람 죽이고 다니는 게 더 재밌겠다' 며 욕지거릴 내뱉는데 이 무지몽매한 MZ 세대들을 어찌 교화해야 할까요. 1968년에 개봉한 <혹성탈출>이 장장 50년에 걸쳐서 리부트되어 왔는데 소비자의 니즈는 50년 전 그 야만성에서 한치도 나아지질 않았으니 개탄할 노릇입니다. 그들이 백인 중심 서부극의 완전한 전복과 미디어에 대한 날선 비판, 쾌락을 쫓는 폭력적 시선에 대한 단죄와 '환상특급'의 고전적 향취가 결합된 이 걸작을 알아볼 심미안을 가질 날이 올까요? 어쩌면 우리가 마지막 세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비참한 심정이네요.
참고로 전작 <어스>보다 두 배 재밌게 봤으니 별점도 두 배로 드립니다.
이만 줄입니다. 댁내 두루 평안하시길.
한줄평 : 메세지를 보내려 거든 우체국을 가라 - 프랑수아 트뤼포
내 별점 : 4 / 10
IMDb : 6.8 /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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