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독 : 이정재
각본 : 이정재, 조승희
주연 : 이정재, 정우성
등급 : 15세
러닝타임 : 125분
장르 : 액션, 드라마
22년 8월에 메가박스 MX관에서 관람했다. 영화관을 떠날 때 어렴풋이 남아있는 감상은 마치 총소리로 샤워를 하고 나온 느낌을 받았는데, 그만큼 블록버스터 액션 장르적인 면에서 관객을 쥐고 흔들 줄 아는 폭발력을 가진 영화라는 인상을 줬다. 다만 어느덧 한국 영화의 고질적인 문제로 자리 잡은 음향 문제가 이 영화에도 적용된 것 같아서 그와 관련하여 왓챠에 웃기는 감상을 적었었는데, 여기에도 옮겨둔다. 다시 보니까 제정신에 쓴 게 아닌 것 같다.

천장에 열 개씩 2열로 스무 개, 양 벽면에 열 개씩 스무 개, 후방에 네 개, 스크린 바로 아래 우퍼가 여섯 개, 도합 50개의 스피커가 사운드를 쏟아낸다. 총소리로 샤워를 했는데 한국어가 안 들린다. 주말에 난청 검사하려고 이비인후과 예약했다가 다른 분들의 평들을 보고 안심하며 취소했다.
사실 음향이나 발음보다도 중요한 건 정보다. 사람이 언어를 이해하는 방식은 주변 환경이 나에게 제공하는 정보를 취합해서 그 상황에 적절히 맞아떨어지는, 내 머리 속에 이미 저장되어 있는 단어를 선택하여 문장으로 조립하는 식이다.
뭔 개소린가 싶으니 예를 들어보자.
군대에서 아침에 선임을 만났을 때 "편의점 오셨습니까" 라고 말해도 그 선임은 자연스럽게 "편히 주무셨습니까" 라고 해석해서 알아듣는다.
물론 후임의 발음이 너무나도 정확하여 선임이 "편의점 오셨습니까" 라고 곧이곧대로 들었어도 문제 될 건 없다. 정신이 제대로 나가지 않은 이상 후임이 선임에게 대뜸 그런 말을 할 리가 없으니, 선임은 잠시 자신의 귀를 의심할 수도 있겠으나 곧 다정한 아침 인사를 건내는 후임에게 따스한 미소로 화답할 것이다. (필자가 만든 예시가 아니라 인터넷에서 본 예시이므로 이미 널리 퍼져 있다. 현역 장병들은 절대로 실생활에서 따라하지 말자)
같은 문화와 언어, 환경 정보를 공유하고 있는 이런 상황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와 발화(發話, speech)를 구사해도 맥락적으로 상응하는 조건 하에 있다면 소통 자체에 문제 될 것은 없지만, 상호 간에 입장이 불균형한 상황에서는 심각한 오류를 발생시킨다.
<라이온 킹>의 아주 유명한 OST <Circle of Life>의 첫 가사를 예로 들어보자.
'Nants ingonyama bagithi baba'는 아프리카 언어로 '사자가 옵니다 아버지' 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만, 이 낯선 발화의 형태는 그에 익숙한 단어를 찾는 우리 머릿속에서 '나주평야 발발이 치와와'로 번역되며 스크린에서 제공하는 시각 정보를 취합하여 '어린 심바에게 나주평야 출신 치와와를 아침 메뉴로 바치는 내용의 가사인가?' 하는 괴상한 해석을 유발할 수 있다. 군대 예시에서 우습게 넘어갔던 발화의 차이가 상호 간의 입장에서 불균형이 일어나자 심각한 왜곡을 초래한 셈이다.
(사실 노래는 '소통'의 예시로 어울리지 않지만 이보다 더 적합한 예를 찾기 힘드니 대충 넘어가자)
이 같은 성질은 의사소통의 특징 중 하나로 학술적으로는 '사회언어학적 능력' 이라 일컫고, 이는 그것이 가지고 있는 세 가지 요소인
언어가 사용되고 있는 사회적 상황, 대화 참여자의 역할, 그들이 나누는 정보
를 토대로 청자-화자 간의 성공적인 상호작용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첫번째 예에 이를 대입하여 군대 조직(사회적 상황), 선임-후임(역할), 아침 인사(정보)를 종합하면 '편의점 오셨습니까?' 보다 '편히 주무셨습니까?'가 상호 소통에 훨씬 어울리는 문장이기에 청자의 머리 속에서 후자로 해석되고, '들리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종합적 정보 판단, 즉 문맥(context)으로 파악되는 셈이다.

잡설이 길었는데 이쯤에서 <헌트>의 대화가 왜 안 들렸는지, 정확하게는 왜 이해하기 어려웠는지를 영화와 관객을 각각 화자와 청자로 설정하고 위에서 언급한 3가지 요소를 대입하여 살펴보자.
먼저 사회적 상황 측면에서 1980년대 독재 정권을 다루는 이 영화는 당연히 2022년에 관람하는 청자에게 쉬울 리 없다.
사회적 상황보다는 시대적 배경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지만 뭐 어쨌든. 많이들 언급하신 내용이니 생략.
대화 참여자의 역할 면에서 보자.
화자인 영화는 그의 발화라 할 수 있는 모든 장면과 대사들을 단순 정보 전달만을 위해 친절히 나열할 순 없다.
영화의 최우선 덕목은 감동(감동)이니까. 느낄 감에 움직일 동자를 쓰는 이 단어를 관객으로부터 얻어내려면 연출자의 창의적, 영화적 기교가 수반되어야 한다. 그 감정이 쾌감, 불쾌감, 기쁨, 슬픔, 회한, 반성 등등 중 무엇이 되었든 그것이 움직이지 않으면 (특히 상업적으로)실패한 영화가 될 것이고, 만약 정보 전달만을 위해서만 영상이 제작된다면 그건 여느 유튜브 영상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에 따라 이야기는 시간의 선형성을 벗어나 플롯이 재배치 되기도 하고 많은 문장들이 숏의 크기와 카메라 앵글, 위치 등으로 치환된다.
간단히 <헌트>의 화법을 살펴보자.
두 주인공의 이름인 '박평호'와 '김정도'는 어떤 서류의 서명으로 소개되고, 그 서명은 클로즈업되어 노골적으로 반복해서 강조된다.
관객에게 익숙한 대하드라마나 사극에서 인물의 등장과 함께 자막으로 소개되는 것이 직접적이라면, 이런 방식은 간접적이고 기교적이다. 이 서명은 이후 중요한 사건의 단초로도 활용되니 인물을 소개하는 정보적인 요소 외에 다른 기능도 가지고 있다. 그 때문인지 필체도 독특하여 알아보기 힘들다. (난 김정도를 김정슨으로 읽었고 '정순이겠지?' 하다가 다음 장면을 놓쳤다)
극 전체를 봤을 때는 경제적으로 내러티브의 세밀함을 더하지만, 당연히 화자-청자 간의 소통적인 면에서는 불친절하다.
안타까운 점은 <헌트>의 모든 화법이 이런 식이라는 것이다.
인물 대립, 직책 갈등, 정치적 역학관계, 국가적 이해관계, 박평호의 정체, 김정도의 동기, 유정의 내막, 동림의 의미.
너무 많은 사건들이 이야기 전개와 동시에 또 다른 사건의 트릭으로 작동한다. 그로 인해 시청각 정보가 쏟아지고, 그것들은 대부분 낯설고 간접적이며 이해를 보충하기 위해 잦은 플래시백을 사용한다.
특히 이 시청각 정보의 품질 자체에 상당한 잡음이 있는데, 청각적으로는 외국인의 어눌한 발음과 망명한 파일럿의 이북 사투리가 섞였고 시각적으로는 비중은 없지만 익숙한 얼굴들(카메오)이 종종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아 중심 사건을 향한 포커스를 흐리게 만든다.
상술한 정보들은 자연스럽게 위에서 언급한 3번째 요소인 '그들이 나누는 정보'와 연결되는데, 총격 액션 못지 않게 첩보 느와르적인 부분에 큰 비중을 둔 영화이니 당연히 인물들의 언어 속에 수많은 은어와 암어, 고유 명사들이 등장하고 우리 머리 속을 혼란시킨다.
동림, 특작 부대, 리 중좌, 목성사, 베드로 사냥, 인민 무력부 등등.
특히 나는 사건의 주요 키워드였으나 내 머리 속에는 없는 '동림'이라는 단어를 캐치하는 것에 몇 번의 반복이 필요했고, 그것이 내부 첩자를 뜻하는 은어임을 깨닫기까지 더 긴 시간이 걸렸다. 이와 같이 해당 단어들을 인식하는 과정에서 그것이 낯선 관객과 대조적으로 그것이 익숙한 등장 인물 사이에 정보 불균형이 존재하고, 그것은 영화의 전개 속도와 청자의 이해 속도 간의 괴리를 발생시킨다.
이것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부분은 박평호의 정체가 밝혀지는 장면이다.
이정재의 어떠한 직접적인 행동이나 대사가 아닌 제 3의 인물인 방주경 보좌관(전혜진 역)의 보고를 통해 관객은 그 진실을 알게 되는데, 그 보고 내용이 관객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성질의 정보(요원의 행적 추적)를 담고 있어 직관적인 이해가 어렵다. 주인공이 내부 첩자였음이 드러나는 중요한 반전이 거의 보좌관의 독백으로 밝혀지는 것은 방식이 불친절할 뿐 아니라 연출적으로도 임팩트가 없다. 중간 중간 보좌관의 대사를 놓친 관객들은 '최아무개가 편도를 타든 왕복을 타든 뭔 상관임? 갑분 고스트? 그게 왜 이정재가 동림이 되는 이윤데?' 하며 어리둥절하는 사이 중요한 사건의 흐름을 놓친 셈이다.

이 영화는 복잡 정교한 내러티브, 속도감과 치밀함이라는 상이한 속성을 동시에 취하려는 전개를 위해서 너무 많은 이해를 관객에게 요구한 것은 아닐까?
관객들이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불만에 대한 이유가 과연 단순한 음향 믹싱이나 배우들의 발음 문제였을까?
만약 내가 관람 이전에 '동백림 사건'이라는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면 '동림'이라는 단어를 훨씬 더 쉽게 유추할 수 있지 않았을까?
같은 첩보 은어지만 내게 '동림'은 잘 들리지 않았고 '빤쓰'는 잘 들렸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이 영화를 본 많은 관객분들이 빤쓰에 열광하는 이유는 뭘까? 단지 빤쓰가 너무 좋아서?
그보다는 마치 일면식도 없는 인파 속에서 한 명의 불알친구를 만난 것처럼, 수시로 밀려오는 낯선 단어들 속에서 찾은 친밀한 그 단어가 무척 반가웠기 때문은 아닐까.
단점 위주로 언급했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는 재밌다. 액션 영화는 잘 때려부수는 것이 최고다.
다만 <헌트>를 <히트>와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로 크게 이분해서 보면 '히트'적인 것은 너무 좋았고, '스파이'적인 것은 조금 아쉬웠을 뿐.
만약 주짓수를 빙자한 몸싸움 장면을 삽입하여 실제로 서로의 빤쓰를 벗기고, 타란티노 마냥 전두환을 토치로 구웠다면 별 다섯개를 줬을 것이다.
한줄평 : 신인 감독 이정재의 폭발적인 데뷔작!
내 별점 : 6 / 10
IMDb : 6.8 /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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